지난 1999년에 소림사를 가기 위해서 낙양에 간 적이 있었지만, 촉박한 일정에 쫓기느라 용문석굴을 보지 못했었다.
아마 그때 용문석굴을 이미 봤더라면 굳이 이번에 다시 낙양을 방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이번 여행은 처음으로 중국 학생들(북경대 사진클럽)과 함께 한 여행이었는데,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하는 여행이라 즐겁기도 하였고 내국인들만이 알 수 있는 현지에 밀착한 여행을 했다.


낙양 시내는 북경에 비해 자동차가 적어서 번잡한 도회를 떠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도로 양쪽의 자전거 도로가 자동차를 위한 도로보다 훨씬 넓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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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얘기한 만두와 죽을 먹었던 식당에서 본 부녀, 문득 홍콩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한 일행들이다. 왼쪽부터 설명을 하자면
일본에서온 겐타- 일본에서 중문과 2년을 공부하고 북경에서 어학연수중이다.
                          어리지만, 나름 독특하고 똑똑한 구석이 있었다.
심리학과 4학년의 장지풍- 대학원 진학예정이며 식물에도 취미가 많다.
                                       필름 카메라 사용, 직접 인화도 한다고 한다.
역학과 2학년의 허지비- 아직 어리고 성격이 좋다. 사진은 입문자 수준
예술과 3학년의 이묘- 카리스마가 있어서 사업을 해도 성공할 스타일. 필름 카메라 사용.
역학과 4학년의 양위광- UCSD(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로 유학갈 예정.
                                   북경대 사진클럽 회장이며 사진을 좋아하는 것이 눈에 띄였다.
                                   올림푸스, 콘탁스, 캐논 등 세 가지 필름(!) 카메라를 가져와서 나를 부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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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파한 후 학부모및 학생들이 길을 건너고 있다



용문석굴 입구의 한 가게, 정으로 쇠판을 두드려 부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용문석굴 입구에서 찰칵, 나름 선글라스가 잘 어울린다.


 

용문석굴로 들어가는 입구, 대학원생은 학생할인이 안된다고 하여 80원을 내고 표를 끊었다

세계의 불교 문화 유산/중국의 용문석굴
김진무/ 불교대학 선학과 강사
용문석굴(龍門石窟)은 중국 중부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남쪽교외에 위치하고 있다. 용문석굴은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과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의 운강석굴(雲岡石窟)과 함께 중국 3대 석굴 중의 하나이며, 중경(重慶)의 대족석각(大足石刻)을 포함하여 ‘중국 4대 석각(石刻)예술의 보물’로 칭해진다. 용문석굴은 돈황의 막고굴과 대동의 운강석굴에 비교하여 그 규모에 있어서는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원인을 바로 돌의 재질에 있다고 분석을 하는데, 용문석굴의 석재는 막고굴과 운각석굴에 비하여 단단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굴을 조성하기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고, 그에 따라 오히려 더욱 높은 예술성을 지니게 된 것이라고 한다.  

초기의 석굴은 439년에 북위(北魏)가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이후 471년부터 477년 사이에 건설되었고, 그 후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 당(唐)에 이르는 400년에 걸쳐 계속 석굴이 확장되어 남북으로 약 천 미터에 이르는 길이에 1300여개의 석굴과 2345개의 불단(佛壇)과 50여개의 불탑(佛塔), 10만여 존(尊)의 불상(佛像)의 규모를 이루게 되었다. 용문석굴의 불상은 암벽에 직접 조각한 것이 특징이며, 불상의 표정들이 아주 풍부하여 높은 예술성을 지니고 있어, 돈황·운강석굴이 벽화가 뛰어난 반면에 용문석굴은 조각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용문석굴은 우리에게 석굴암을 연상시킬 정도로 그 기법에 있어서 서로 상당한 관련성을 학계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낙양의 남쪽에 위치한 용문석굴은 이하(伊河)라고 불리는 강변을 따라 조성되어 있다. 이하를 중심으로 서쪽이 용문산(龍門山)이고, 동쪽이 향산(香山)으로 협곡을 이루어 용문협(龍門陜)이라고 부른다. 이하는 북쪽으로 흐르고 있어서 용문석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기준으로 보면 좌측이 향산이고 우측이 용문산으로, 양측을 연결하는 대교에서 바라보면 양 산이 마치 문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다.

용문석굴의 수많은 석굴 가운데 빈양중동(賓暘中洞)과 봉선사(奉先寺), 고양동(古暘洞)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빈양중동은 북위(北魏) 석굴예술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석굴은 약 24년 동안에 걸쳐 80만 명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건설되었다고 하는데, 전체 석굴의 건설기간이 가장 길다고 한다. 이 석굴은 북위의 선무제(宣武帝)가 선친인 효문제(孝文帝)와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를 위하여 대동의 운강석굴과 함께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 석굴에는 11존의 대불상이 있는데, 중앙의 석가모니 좌상(坐像)은 비록 비로자나불만큼 크지는 않지만, 역시 뛰어난 예술성을 평가받는다. 또한 이는 효문제를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 때문인지 좌상에서는 불교의 외호(外護)보살로 불리는 효문제의 자비로운 풍모가 엿보이는 듯하다.

봉선사는 용문석굴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석굴 가운데 제일 큰 동굴로서 당(唐)대 조각예술의 풍격을 대표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동굴은 길이와 너비가 각기 30여 미터로서 전체적인 조각군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중국 석굴의 백미(白眉)로서 평가받고 있다. 이 석굴의 정 가운데 17미터의 웅장한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있어 사람들의 눈을 끌고 있다. 이 불상은 당(唐) 고종(高宗) 때 조성되었는데, 바로 중국 유일의 여황제였던 측천무후를 모델로 하였다고 전해진다. 고종은 측천무후의 모습이 보살과 같이 단아하다고 자주 칭찬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후세에도 남길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이 비로자나불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비로자나불상은 풍만한 아름다움과 함께 범접하지 못할 위엄을 함께 지니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권력에 대한 욕심을 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비로자나불 좌우에는 제자와 보살상을 비롯하여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시립(侍立)하고 있는데, 그 역시 뛰어난 예술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우측에 있는 천왕상은 상당히 훼손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고양동은 용문석굴에서 제일 먼저 조성된 동굴로서 가장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양동에는 수많은 조상에는 그 당시 불상을 만든 사람의 이름과 시기, 원인 등이 기록되어 있어, 석굴과 조각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외에 당초(唐初)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잠계사(潛溪寺)와 연화동(蓮華洞), 약방동(藥房洞)이 유명한데, 특히 약방동은 양쪽 벽에 15,000개 이상의 작은 불상군에 각종 병에 대한 한방처방이 쓰여 있어 높은 자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용문석굴은 북위에서 당에 이르는 400여 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고, 그 다양한 불상과 조각들의 표현양식으로 인하여 대량의 종교와 미술, 서예, 음악, 복장, 의약, 건축, 중외 교통을 비롯한 실물과 자료들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또한 ‘대형 석각예술박물관’이라고 칭해지고 있다. 특히 용문석굴의 계통적이고 독특한 조각방식은 중국조각에 있어서 여러 가지 규율과 법칙을 제시하였고, 이는 그 당시의 사회문화와 서로 융합한 것으로서 강렬한 중국화와 세속화의 추세를 가지고 있어 중국 석굴예술변혁의 이정표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용문석굴은 상당히 훼손되어 있다. 그것은 불두(佛頭)을 소장하면 복을 가져온다는 중국 민간의 속신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근세에 이른바 탐험대로 명명한 서양의 도굴단에 의한 것이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용문석굴에서 도굴한 문물의 대부분이 유럽과 미국의 개인소장품으로 감춰져 있고, 그 가운데 일부가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예술박물관과 칸자스시에 있는 아트킨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중국의 문화혁명(文化革命) 시기에 홍위병(紅衛兵)들에 의하여 상당한 부분이 훼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문화혁명 초기에 홍위병에 의하여 훼손되다가 낙양의 주둔하고 있는 불심 깊은 장군이 도맡아 파괴할 것을 자청하고, 석굴입구를 봉쇄하여 완전한 파괴를 막았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용문석굴은 2000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중국문화재 가운데 26번째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용문지역의 석굴과 불대(佛臺)는 불교 가운데 종교적 제재(題材)를 상세하고 사실 그대로 묘사한 예술작품으로서 중국 석각예술의 최고봉을 대표한다.”라고 평가하고, “용문석굴의 조각은 인간의 예술적 창조성의 뛰어난 증거이며 아시아지역의 문화적 진화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예술형태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더욱이 용문석굴은 우리의 석굴암과 상당한 연계성을 가지고 있어 보다 우리에게 친밀하게 느껴진다고 하겠다.




바위 사이로 피어난 강인한 생명력이 인상적이었다.
오른쪽은 홍콩에서 온 고위관리의 수행원들.



무수한 부처들이 벽에 새겨져 있다



어떤 조각들은 문화대혁명때 훼손되었다고 한다



-용문석굴의 서산 중앙에 있는 봉선사동(奉先寺洞)의 대로사나불(大盧舍那佛)은 높이 13m의 거대한 석불로서, 협시(脇侍)인 보살상·나한상·신왕상(神王像인왕상 등과 함께 당()나라 조각의 최고봉을 이룬 수작으로서, 그 조상기술(造像技術)의 뛰어남과 높은 품격은 특기할 만하다-고 한다.






부처의 표정, 초월한 듯 하면서도 차가워 보인다.



오른쪽의 조각은 무언가에 화들짝 놀란 듯한 표정



부처의 오른쪽에 있는 조각들



용문석굴의 봉선사동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강건너에서 바라본 용문석굴, 멀리 중앙에 봉선사동이 보인다.



낙양 시내로 돌아온 후 저녁에 야경을 찍기 위해 나섰다.
저녁,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강태공의 모습이다.



커다란 팽이를 가지고 노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제기(!)를 가지고 네트까지 갖춘 채로 족구 비슷하게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거의 신기의 수준이었다.



by 오래된未來 2007/05/04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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